p.42-43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기가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자기를 만나기 전에 하나의 삶을 살았어.
그것을 하나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하지만 심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이젠 모든 게 그림자로 여겨질 뿐이야. 어쨌든 당신만한 남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어.>
p.54-55
엘렌! 그녀와 나는 기숙학교 시절에 늘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다.
취향이며 이상이며 신념이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 게 많았던지.
우리는 장차 <선택받은 사람>이 될 우리의 신랑감이 지녀야 할 특성들을 열거하면서 숱한 밤을 보내곤 했다.
우리는 그 점에 관해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신을 갖고 있었다.
지난 3월에 나는 뿌아띠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엘렌이 보낸 편지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내 남편 에릭을 너에게 소개해야겠어.>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네가 이리로 오렴. 남편하고 같이 오면 좋겠구나. 나도 너에게 필립을 소개하고 싶어.>
그들 부부가 왔다. 그들의 인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고, 그녀의 남편은 정말이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엘렌 역시 내 남편 필립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의 남편들은 서로 마음이 썩 잘 맞는 눈치였다.
엘렌과 나 사이에는 어떤 거북스러운 느낌 같은 것이 둥지를 틀었다.
그들 부부를 역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필립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 친구 엘렌 말이야, 내가 보기엔 너무 평범해. 그에 비해 남편은 아주 괜찮던데, 뜻밖이야.>
<그래요, 뜻밖이예요. 내 말이 그 말이예요.>라는 대답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p.58-59
그녀에게서 전화를 받고 나면, 나는 밖으로 달려나가 내 사랑을 찬미하고
내 사랑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라도 몇 곡 목이 터져라 불러 보고 싶다.
하지만 천성이 소심한 데다 목소리도 변변찮은 나로서는
그저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밖으로 나서면 내 개가 따라 나오고, 우리는 시골로 나간다.
내 개가 불한당처럼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는 서슬에, 집토끼, 산토끼, 자고새들이 달아난다.
얼마 안 있으면 금렵이 풀리고 사냥철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렴풋한 불안이 문득 고개를 쳐든다.
전화 한 통 받고도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나중엔 그녀 때문에 내 삶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p.60-61
내가 그녀에게는 이제 신비로운 구석이 별로 없다고 말한 이후로,
그녀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어쩌면 그녀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이따금 사람을 시켜 그녀의 뒤를 밟게 하고 싶은 으스스한 유혹을 느끼곤 한다.
p.66-67
마리 프랑수아즈는 이따금 자기가 내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자책하면서
그 중압감을 견딜 수 없어 하곤 했다.
그녀가 내게 너무 많이 떠넘겼다는 그 짐의 무게를 나는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녀가 너무 괴로워할 때면, 나는 그녀를 어떤 레스토랑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그때의 음식 값은 나의 경제적인 능력에 비해 너무 비싼 경우가 흔했다.
그것이 또 자책감을 부추겨서 그녀의 괴로움을 배가시키기가 일쑤였다.
응답 메시지를 더욱 상냥하고, 더욱 쾌활하고, 심지어는 웃음이 나올만큼 재미있게 고쳐서
내 자동 응답 전화기에 새로이 녹음해 두었건만,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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